한국 교회사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자

dudol 0 2,395 2010.01.04 17:14
김기량 펠릭스 


1. 무속신앙의 영향이 강한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김기량(펠릭스)

순교자의 행적을 밝혀줄 사료의 대량 발굴은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 관련자료 발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김 펠릭스에 관한 기록이 있는 편지가 <전교회지>를 통해 알려진 적은 있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가 이번에 발굴한 루세이유(1832-1900) 신부의 편지
4통은 원본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새 편지들의 발견으로 김 펠릭스에 대한 적잖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무엇
보다도 그의 영세 연월일을 알아낸 것은 최대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 펠릭스는 1857년 성령강림주일에 영세와 동시
에 첫영성체를 했다. 1857년의 부활절이 4월 12일이므로 그의 영세일은 5월 31일
이 된다. 이에 따라 제주교구는 이 날을 성대히 기념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됐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김기량 순교자의 세례명이 펠릭스라는 결정적인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의 세례명이 펠릭스, 또는 베드로, 아릭수 등으로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성과 본명이 김 펠릭스였다는 사실은 이번에 발굴된, 루세이유 신부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됐다.
새로 발견된 편지가 게재된 루세이유 신부의 전기에는 김 펠릭스가 자신이 교우임
을 증명하기 위해 교우들에게 자신의 영세 증명서를 제시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나온다. 이는 곧 루세이유 신부가 김 펠릭스의 영세 사실을 홍콩 대표부의 영세
대장에 기록해 놓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기량 순교자의 족보인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의 발굴은 가톨릭
신문사 제주지사장인 이창준(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총무) 씨가 올 초 족보
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과 함께 입수함으로써 빛을
보게 됐다.
족보의 발굴로 순교자의 정확한 생몰연대와 집안 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적잖은 성과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족보는 제주교구가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사료 수집에
들어간 이래 7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발굴한 것이어서 뜻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사료 발굴에 대해 교회 사학자들은 순교자를 향한 <거룩한 인내>
의 결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어 앞으로의 교회사 사료 발굴 작업에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7일자 4면 서상덕 기자의 글에서 옮김


2. 김기량 순교자는

병인박해 순교자 가운데 가장 많은 사료가 발굴된 김기량(펠릭스 1816-1866) 순교자는
제주 지역의 첫 사도로 김대건 신부의 표착 이후 제주도가 천주교와 다시 관련을 맺게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의 무역을 하던 중 표류하여 묘하게 홍콩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까지
안내된 그는 이곳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만돌에게 교리교육을 받고 42세 때인
1857년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 이듬해 제주로 귀환한 후 그의 일가를 시작으로 전교활동을 펼친 그는 간간이 육지
로 나와 판공성사를 받으며 복음 전파에 노력했다. 그러다 박해를 피해 경상남도 통영
으로 이주했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제주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7일자 2면 서상덕 기자/이창준 제주지사장의 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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